옛날에도 몇만 석씩 하는 거부가 많았다. 하지만 당대에 벌고 차대에는 망하는 것이 한국 부자 행로의 공식처럼 돼 있었다.
물론 백성들의 이미지도 나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차대에 망하질 않고 또 이미지도 좋았던 소수의 부
자들 행태를 살펴보는 것도 한 방편일 수 있을 것이다.
10대 진사에 10대 만석을 유지했다는 경주 최부자의 경우를 보자.
이 가문에는 대대로 전승된 가법이 있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재산은 만석 이상 절대 늘리지 말라는
것이 가법이었다.
진사란 향시만 급제하면 되는 실직 없는 명예에 불과하다. 부침이 심한 권력과 결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렇게 가법으로
묶어둔 것이다.
1만 석 이상 가산을 늘리지 말라는 제한은 경제법칙상 어긋나는 제재이긴 하다. 왜냐하면 애써 늘리지 않는다 해도 해마다
자연증식이 불가피하여 1할만 늘더라도 1천석의 잉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잉여를 가산에 보태지 말고 소작인의 이득으로 돌리거나 다리를 놓고 보를 막는 등의 공익을 위해 소비해버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최부자가 권세에 오염된다는 법도 없고 또 부자라 해서 이미지를 손상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러름받으며 부를 10대
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단 최부자뿐 아니라 옛날 부자들 가운데는 동네나 고을의 사람들에게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한 관행이 여러 모로 제도화돼
있었다.
이를테면 '마당쓸이'가 그것이다. 동네에서 양식 떨어진 사람이 있으면 이른 새벽에 부자집 앞마당을 쓸고 돌아갔다. 물론
쓸어달라고 원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이 절량의 사인이며, 부자집에서는 그 식구가 보름이나 한 달 먹을 양식을 어떤 보상
조건 없이 종에게 지워 보내곤 했던 것이다.
이같이 후덕한 부자를 '덕부'라 했는데, 덕부가 있는 마을에서는 논 한 다랑이, 밭 한 뙈기 없는 가난뱅이도 각박하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전경련에서는 큰 기업인들에 대한 백성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는 데 부심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큰 기업인들에
덕부가 많지 않기에 자생된 부심일 것이다.
큰 기업인들의 행태가 사실보다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도 있다 하여 각계 각층과의 대화로써 국민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을
길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정말로 그 길 밖에 없는 걸까.